번   호   58 조   회   2808
이   름   박초풍 날   자   2002년 11월 05일 20시 26분
제   목   이삭호 이야기 23호
안녕하세요.
어제가 화요일(이삭호 선장님 읍내 나와 컴-연결하는 날)인 줄도 모르고
퇴근후 이삭호에서 멜이 온 것을 보고서 아차 했습니다.
멜도 한 장 보내지 못했는데...
이렇게 받기만 하니 송구스럽기 그지 없군요.
내일(사모님 현지로 돌아가는 날...마중?) 읍내 나오시기 전에 간단한 멜이라도 보내 드려야 겠습니다.-----------------------------------------


전 형 안녕하시오.

이번 집사람의 한국방문에 폐가 많았던 것 같은데 그저 고마울 따름입니다.
수영만의 많은 동료요티들의 따듯한 환대에 감사의 뜻을 집사람이 전해 왔습니다.
모든 분들에게 다시 한번 감사합니다.
본인은 별 특이한 사항 없이 평화로이 지내고 있습니다. 필리핀 내 여러 곳에서 폭탄테러와 인질납치, 반군과의 교전 등 많은 문제가 있지만 이삭이 정박중인 본보논 만은 다른 세상처럼 조용하고 한가롭습니다. 잘 모르는 상태에서 정한 항해계획이었지만 운 좋게도 제대로 짚은 거 같습니다. 한 여름철 우기를 피해 고향에 갔던 요티들이 이제는 대부분 돌아왔어요. 모두들 11월 중순부터 시작되는 NE몬슨의 바람을 따라 다음 항해지로 출항하려고 요즘은 배를 손보느라 바쁩니다. 배 관리가 생각보다 일이 많잖아요. 덱크부터 선실 내를 몽땅 들어내고 다시 작업하는 요티도 있습니다(필리핀 인건비가 일류 일꾼도 일당 4000원이면 됩니다). 나도 친구 따라 강남 간다고 덩달아 이곳저곳 소소한 부분의 보강작업과 군데군데 페인트가 부실해진 곳의 페인팅을 보수하고 있어요. 이곳의 조석간만의 차이가 많을 때는 1.5미터 정도 되는데(평시에는 1-1.2미터) 이를 이용하여 웬만한 보수작업은 충분히 가능합니다. 배가 크고 휜 킬 요트는 선체 바닥의 킬 부분은 수리가 어렵지만 그래도 웬만한 건 모두 처리들을 하고 있습니다. 내 배는 흘수가 1.2미터밖에 안되고 훌-킬 정이므로 맘만 먹으면 거의 완전한 수리가 가능할거 같아요. 그래 요즘은 선배 요티들의 배수리 작업을 보고 배우며 시간을 보냅니다.
그리고 참고로 가보지 않은 곳의 장거리항해를 하려면 꼭 필요한 게 크루징 가이드 북 이더라구요. 지역별로 요트 마리나를 비롯하여 안전한 정박지를 상세하게 기록해 논 책들이 많아요. 나는 '지미 코넬' 의 '월드 크루징 가이드'라는 책을 하나 사보고 너무 막연하게 설명되어있어서 가이드 북을 별로 중요치 않게 생각했었는데, 각 지역별로 직접 항해해본 경험을 살려 아주 상세하게 정박지의 안내와 접근방법, 주의해야 될 사항, 앵커 위치, 인근의 각종 편의시설, 세관 및 출입국사무소의 위치와 출입국절차 등을 많은 약도와 함께 상세히 기술해 논 좋은 책들이 많더라구요. 그간 준비과정에서 해도만 모으느라 애를 썼는데, 이제는 저렴한 GPS에도 상당히 정확한 해도가 입력되어있고, 또 전자해도(C-Map 등등)가 일반화 되어가고 있는 추세이므로, 부피가 많아지고(무게도 무시 못함) 보관이 힘든 해도를 많이 모으는 것보다는(물론 해도도 꼭 필요한 곳은 갖춰야 하지만) 지역별 상세 크루징 가이드 북을 많이 모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세계를 다 돌아보려면 이런 상세 가이드 북이 약 20권 정도 필요하답니다. 일반적으로 세계여행중인 요티들은 이런 지역별 상세 크루징 가이드 북을 서너권씩은 모두 갖고 다니므로 수영만에 입항하는 외국요티들을 만날 때 한번 교섭해 보세요.
그리고 지난번 얘기한 미국 '핵켈' 영감님이 6월 1일 일본 오사카를 출항한지 140일 만에 하와이에 무사히 도착했습니다. 북위 40도선 위의 편서풍을 따라 태평양을 넘어가다가 샌프란시스코로 들어가려 남진하여 무역풍대에 들어가니 도저히 동진할 수 없어 다시 되돌아 서진하여 10월 22일 오전 5시 하와이안 요트클럽에 무사히 입항하셨답니다. 우선 간단히 보내온 소식을 보면 씨-앵커가 너덜너덜 다 찢어지고(통째로 떨어져나가는 예는 많아도 씨-앵커 자체가 발기발기 찢어진 예는 거의 없답니다. 그래 제조회사에 보여 주려고 건져 싫고 왔답니다), 메인쎄일이 찢어지며 붐이 같이 마스트에서 떨어져 나가면서(2단 축범 상태에서) 좌현 라이프라인을 같이 쓸어가 버렸고, 양키 집 쎄일도 날라가 버렸으며, 윈드베인 완전 파손, 무전기안테나 유실, 칵핏 닷져 및 목재로 부착한 기타부분들이 모두 부셔져 버렸답니다. 영감님이 메일에 쓰시긴 '모든게 다 날아가 버렸어' 예요. 정말 86세(우리 나이로 하면 87세가 되지요)의 연세에 대단하신 영감님입니다. 우리야 1주일도 안 되는 항해코스에서도 아마 엔진을 절반이상 이용하고도 큰일이나 한 거처럼 행세하지만, 이번 영감님의 항해를 지켜보며 많은 부끄러움이 느껴졌습니다. 정말 노후를 아름답고 박력 있게 보내시는 인간승리의 산 증인이시고 훌륭하고 존경스러운 분입니다. 어제저녁은 혼자서 칵핏에 앉아 그분을 위해 건배를 여러 번 하는 바람에 많이 취했었어요. 또 다른 소식으론 새로 입항한 요트로부터 금년 5월 본보논을 떠나 필리핀 일대를 항해중인 '집시 로져'라는 33피트급 요트가 앵커링 중 강풍을 만나 떠내려가 암초에 부딪쳐 배를 잃어 버렸다는 소식을 전하는군요. 3살박이 예쁘장한 딸과같이 여행중인 부부였는데 다행히 사람들은 모두 무사하답니다.
오늘은 날이 청명하니 아주 좋군요. 자 그럼 뭔가 좀 해봐야 되겠네요.
다시 한번 더 수영만의 좋은 요티 동료들에게 감사함을 전합니다.
2002년 10 월 31 일 필리핀 본보논에서 이 삭 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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